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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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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몰락하는 왕, 떠오르는 영웅,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를 읽고 권력이란 무엇인가? 정당성이란 또 무엇인가? 셰익스피어는 400년 전, 이 묵직한 질문을 <리처드 2세>라는 비극적 역사극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왕의 몰락과 다른 왕의 등장을 그린 사극을 넘어, 권력의 속성과 인간 본성의 심연을 파헤치는 정치 드라마이자 심리극이다. 이 번역본은 셰익스피어 특유의 시적 언어와 극적 긴장감을 살리면서도 현대 한국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듬어져, 마치 눈앞에서 연극이 펼쳐지는 듯 생생한 대사들은 우리를 순식간에 14세기 말 혼란스러운 영국 왕궁으로 데려간다. <리처드 2세>는 신이 내린 왕권(Divine Right of Kings)을 믿는 리처드 2세와 그의 사촌이자 숙적, 헨리 볼링브룩(훗날 헨리 4세) 사이의 갈등을 축으로 전개된다. 리처드 2세는 정통성은 가졌으나 통치에는 무능하고 사치스러우며 감정적이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자의적으로 휘두르며 숙부인 곤트 공작의 재산을 몰수하고, 볼링브룩을 부당하게 추방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비극은 예고된다. 작품 초반, 리처드는 볼링브룩과 모브레이의 결투를 중단시키며 왕의 위엄을 과시한다. 리처드 왕 따라서 우리는 그대들을 우리 영토에서 추방하노라. 그대, 헤리퍼드의 사촌이여, 목숨을 걸고, 두 번의 다섯 여름이 우리 들판을 풍요롭게 할 때까지 우리의 아름다운 영토에 다시 인사하지 말고 추방의 낯선 길을 걸으시오. 볼링브룩 뜻대로 하소서. 이것이 제 위안이 되어야겠습니다. 여기서 폐하를 따뜻하게 하는 그 태양이 저에게도 비출 것이고, 여기서 폐하에게 빌려진 그 황금빛 광선들이 저를 가리키며 제 추방을 금빛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리처드의 오만함과 볼링브룩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수용이 대조를 이룬다. 리처드는 자신의 결정이 절대적이라 믿지만, 볼링브룩의 대답에는 미래를 향한 암시가 담겨 있다. 그는 태양 빛이 자신에게도 비출 것이라 말하며, 왕의 권위 아래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리처드의 실정은 곧바로 민심 이반과 귀족들의 반발로 이어진다. 특히 존 오브 곤트가 죽어가며 쏟아내는 영국에 대한 애정과 왕에 대한 질타는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다. 비록 이 번역본에서는 "이 왕들의 왕좌, 이 홀 든 섬(This sceptred isle)"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곤트의 대사 전체에서 그 정신은 충분히 살아난다. 곤트 이 왕들의 왕좌, 이 홀 든 섬, 이 위엄의 땅, 이 전신 마르스의 자리, 이 또 다른 에덴, 이 반쪽 낙원, ... 이토록 소중한 영혼들의 이 땅, 이 사랑하는 땅, 온 세상에 명성을 떨친 이 소중한 땅이 이제 임대되었네?죽어가며 선언하노니? 마치 셋방이나 하찮은 농장처럼. ... 남들을 정복하던 영국이 스스로에게 치욕스런 정복을 당했구나. 곤트의 이 절규는 리처드의 통치가 얼마나 국가를 위태롭게 만들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임대된 영국'이라는 표현은 왕이 사익을 위해 국가의 존엄성마저 팔아넘겼다는 신랄한 비판이다. 이러한 상황은 볼링브룩에게 귀국의 명분을 제공하고, 그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이끌고 영국 땅을 밟는다. 셰익스피어는 리처드 2세라는 인물을 통해 권력의 허망함과 인간적 나약함을 동시에 그려낸다. 아일랜드 원정에서 돌아와 자신의 왕국이 볼링브룩에게 넘어갔음을 알게 된 리처드의 절망은 처절하다. 그는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왕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이름마저 낯설게 느끼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의 언어는 현실적인 힘을 잃은 대신, 시적인 아름다움과 철학적 깊이를 더해간다. 리처드 왕 하나님을 위해 땅에 앉아 왕들의 죽음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하자? 어떤 왕은 폐위되고, 어떤 왕은 전쟁에서 죽고, 어떤 왕은 자신이 폐위시킨 유령들에게 시달리고, 어떤 왕은 아내에게 독살되고, 어떤 왕은 잠들어 죽임당하니, 모두 살해당했다. ... 나는 그대들처럼 빵으로 살고, 결핍을 느끼고, 슬픔을 맛보고, 친구가 필요하다. 이렇게 굴복당했는데 어떻게 그대들이 내게 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독백은 왕이라는 허울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고독과 슬픔을 절절하게 드러낸다. 왕관의 무게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덧없는 인생에 대한 회한뿐이다.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슬픔을 느끼고 친구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리처드가 왕위를 볼링브룩에게 양위하는 장면, 특히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장면이다. 리처드 왕 그 거울을 내게 달라, 그 안에서 내가 읽으리라. 아직 더 깊은 주름은 없는가? 슬픔이 내 얼굴에 그토록 많은 타격을 가했는데 더 깊은 상처는 만들지 못한 것인가? ... 오, 아첨하는 거울이여, 번영 시절의 내 추종자들처럼 너는 나를 속이는구나. 이 얼굴이 그 얼굴이었던가? ... 부서지기 쉬운 영광이 이 얼굴에 빛나는구나. 영광만큼이나 부서지기 쉬운 얼굴이여! (거울을 바닥에 내던진다.) 바로 그것이다, 백 개의 조각으로 깨어졌다. 침묵하는 왕이여, 이 장난의 교훈을 새겨라. 내 슬픔이 얼마나 빨리 내 얼굴을 파괴했는지. 왕관을 내려놓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잃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성찰의 순간을 맞이한다. 거울에 비친 것은 왕이 아닌, 한낱 부서지기 쉬운 인간 리처드일 뿐이다. 이 장면은 권력의 허망함과 자아 성찰의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거울을 깨뜨리는 행위는 자신의 과거와 영광을 부정하는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 볼링브룩은 냉철한 현실주의자이자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추방 철회와 재산 반환만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결국 왕위까지 차지한다. 그의 행동은 정당한가? 셰익스피어는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권력의 공백은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며, 그 과정에서 정당성보다는 실질적인 힘과 민심의 향배가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순한 선악 구도로 인물들을 재단하지 않는다. 리처드는 무능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락 과정에서 보여주는 인간적인 고뇌와 시적인 언어는 독자들의 연민을 자아낸다. 볼링브룩은 찬탈자이지만, 그의 결단력과 통치 능력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수습할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셰익스피어는 이처럼 입체적인 인물 설정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와 인간에 대한 다층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리처드 2세>의 몰락은 단순히 한 왕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이 어떻게 민심을 잃고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권력이 어떻게 채우는지를 보여주는 정치학 교과서와 같다. 또한,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리처드의 절규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이다. 이 번역본은 원작의 시적인 아름다움과 극적인 힘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현대 한국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다듬어졌다. 각주나 해설이 없어 본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어렵고 고루하다는 편견을 가진 독자라도 이 책을 통해 그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리처드 2세>는 우리에게 묻는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이며,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역사는 반복되는가, 아니면 우리는 과거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400년 전에 던진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의 작품이 왜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평가받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정치적 격변기, 리더십의 부재가 느껴지는 오늘날, <리처드 2세>의 이야기는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이 책을 덮고 난 후, 당신은 분명 주변의 세상과 권력의 풍경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