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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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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헛소동’, 유쾌한 소란 속에 숨겨진 인간 본성의 민낯
셰익스피어. 이름만 들어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작가다. 그의 4대 비극은 인간 존재의 심연을 파헤치는 깊이로 우리를 압도하지만, 때로는 그 무게감 때문에 선뜻 다가서기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비극만 쓴 건 아니다. 그의 희극들은 유쾌한 웃음과 재치 넘치는 대사, 그리고 해피엔딩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중에서도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은 셰익스피어 희극의 정수라 할 만한 작품이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헛소동’. 대체 무엇이 ‘헛된’ 소동이란 말인가?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우리는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오해, 사랑의 열병과 명예에 대한 집착이 때로는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에서 비롯되는지, 혹은 ‘엿듣기(noting)’와 ‘주목하기(noting)’라는 사소한 행위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지 깨닫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이 ‘nothing’이라는 단어에 당대 속어였던 여성의 성기(陰門)라는 의미까지 중첩시키며,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망과 사회적 체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이 책, 글길지기 번역의 ‘헛소동’은 단순한 고전의 재현을 넘어, 셰익스피어가 직조해낸 언어의 향연과 극적 긴장감을 우리말로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마치 잘 차려진 지적 만찬과 같다. 한 입 베어 물면 터져 나오는 재치와 풍자의 과즙, 곱씹을수록 느껴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독자들을 매혹한다. 말(言)의 전쟁, 사랑의 서곡: 베네딕과 베아트리스 ‘헛소동’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베네딕과 베아트리스라는 두 주인공에게서 나온다. 이들은 서로를 향해 독설과 조롱을 퍼붓는 ‘즐거운 전쟁(merry war)’을 벌이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에 대한 강한 끌림과 자존심이 숨겨져 있다. 셰익스피어는 이들의 입을 통해 언어유희의 극치를 보여준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번뜩이는 재치 문답은 독자들에게 지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가령, 그들의 첫 만남부터 불꽃이 튄다. 전쟁에서 돌아온 베네딕의 안부를 묻는 전령에게 베아트리스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베아트리스: 대체 이번 전쟁에서 그가 죽이고 먹은 적이 몇이나 될까요? 내가 그가 죽인 것들을 모두 먹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중략) 베아트리스: 썩은 음식이 있었는데 그가 도와서 먹어치웠다는 거죠? 정말 용감한 대식가로군요. 위장도 튼튼하고요. 이 얼마나 신랄한 조롱인가. 하지만 이런 그녀의 독설은 베네딕에 대한 깊은 관심의 반증이기도 하다. 드디어 두 사람이 직접 맞닥뜨렸을 때의 대화는 더욱 가관이다. 베아트리스: 베네딕 나리는 여전히 말이 많으시네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죠. 베네딕: 어머! 존경하는 경멸부인, 아직도 살아계셨습니까? 베아트리스: 베네딕 나리 같은 훌륭한 먹이가 있는데 경멸이 어떻게 죽겠어요? 당신이 나타나면 예의조차 경멸로 변할 텐데요. 베네딕: 그럼 예의는 변절자로군. 하지만 난 모든 여인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확실해요. 당신만 빼고요. 내 마음이 그리 차갑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솔직히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거든요. 베아트리스: 여자들에겐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성가신 구혼자에게 시달렸을 테니까요. 신과 내 차가운 피에 감사해요. 나도 당신과 같은 성향이거든요. 남자가 날 사랑한다고 맹세하는 것보다 내 개가 까마귀에게 짖는 소리가 더 좋아요. 이처럼 서로를 향해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지만, 우리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묘한 긴장감과 함께 서로를 향한 숨길 수 없는 매력을 감지하게 된다. “존경하는 경멸부인(my dear Lady Disdain)!”이라는 베네딕의 호칭은 그 자체로 역설적인 애정 표현처럼 들린다. 이 번역본은 이러한 원어의 맛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아, 마치 눈앞에서 두 배우가 핑퐁처럼 대사를 주고받는 연극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이 ‘앙숙’ 커플은 주변 사람들의 유쾌한 계략에 넘어가 서로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게 되면서 극적인 심리 변화를 겪는다. 스스로 지독한 독신주의자임을 공언했던 그들이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은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감정에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특히 베네딕이 베아트리스를 위해 그녀의 원수인 클라우디오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장면은, 그가 단순한 말싸움꾼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인물임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순수와 오명, 엇갈린 운명: 클라우디오와 히어로 베네딕과 베아트리스의 재치 넘치는 사랑 이야기와 대조적으로, 클라우디오와 히어로 커플의 이야기는 다소 정통적인 로맨스와 비극의 양상을 띤다. 젊고 순수한 귀족 클라우디오는 레오나토 총독의 딸 히어로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들의 사랑은 돈 페드로 왕자의 도움으로 급속도로 진전된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돈 존이라는 악인의 간계에 의해 산산조각 난다. 돈 존은 부하 보라치오를 시켜 히어로가 부정한 관계를 맺은 것처럼 꾸미고, 이를 목격한 클라우디오는 결혼식 당일 모든 하객 앞에서 히어로에게 치욕적인 모욕을 준다. 클라우디오: 꺼져라, 이 위선자! 내가 폭로하겠다! 넌 달의 여신 다이애나처럼, 피지 않은 꽃봉오리처럼 순결해 보이지. 하지만 네 피는 비너스보다, 야수적 욕정에 미친 짐승들보다 더 뜨겁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한순간에 순결한 처녀에서 부정한 여자로 낙인찍힌 히어로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그녀의 아버지 레오나토는 딸의 명예가 더럽혀진 것에 절망한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사회가 여성의 ‘명예’와 ‘정조’에 얼마나 가혹한 잣대를 들이댔는지,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철저히 파괴할 수 있는지를 목도한다. 클라우디오의 경솔함과 쉽게 선동되는 모습은 오늘날 가짜뉴스와 마녀사냥이 판치는 세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겉모습과 평판에 의존해 진실을 외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비극의 씨앗이다. 다행히도 프란시스 수사의 지혜로운 조언으로 히어로는 죽음을 가장하고, 이후 모든 음모가 밝혀지면서 극은 해피엔딩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히어로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레오나토의 슬픔은 단순한 희극적 장치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무게가 상당하다. 셰익스피어는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의 의미를, 빛나는 행복 아래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어수룩한 정의의 파수꾼, 도그베리와 버지스 자칫 무겁게만 흐를 수 있는 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은 바로 어수룩한 순경 도그베리와 그의 동료들이다. 이들은 허풍스럽고 무능해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돈 존의 음모를 밝혀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말실수와 상황에 맞지 않는 진지함은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동시에, 고귀한 신분의 인물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를 더욱 희화화한다. 예를 들어, 도그베리는 자신을 ‘당나귀(ass)’라고 부른 콘라드를 처벌해달라며 이렇게 외친다. 도그베리: 내 자리를 의심하는 거야? 내 나이를 의심해? 오, 그가 날 당나귀라고 적어줬으면! 하지만 여러분, 내가 당나귀라는 걸 기억하세요. 적혀있지는 않지만, 내가 당나귀라는 걸 잊지 마세요. (중략) 나는 현명한 사람이야. 게다가 관리고, 게다가 가장이고, 게다가 메시나에서 가장 잘생긴 몸매의 소유자야. 그리고 법을 아는 사람이고, 충분히 부유한 사람이고, 손해를 본 사람이고, 가운 두 벌과 멋진 것들을 가진 사람이야. 데려가라. 오, 내가 당나귀로 기록됐으면!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어리석어 보이는 인물들이 결국 진실을 밝혀낸다는 설정은, 셰익스피어가 평범한 민중들에게 보내는 은근한 지지이자, 고상한 척하는 귀족 사회의 위선에 대한 풍자일지도 모른다. 정의는 때로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실현되기도 하는 법이다. 왜 지금, ‘헛소동’을 읽어야 하는가? ‘헛소동’은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선다. 이 작품은 말의 힘, 소문의 파급력, 명예와 체면, 진실과 거짓, 사랑의 본질 등 인간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4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 작품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인간 군상과 그들이 겪는 갈등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때로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가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때로는 한없이 이성적이다가도 한순간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모습 또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 번역본 ‘헛소동’은 셰익스피어의 깊이 있는 통찰과 빛나는 언어를 현대 한국 독자들이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다듬어졌다. 원문의 시적인 아름다움과 극적인 긴장감을 살리면서도, 마치 우리 시대의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읽힌다.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캐릭터, 촘촘하게 얽힌 사건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유머와 감동은 독자들에게 지적인 즐거움과 함께 삶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어렵고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이 있다면, 이 책 ‘헛소동’을 통해 그 편견을 깨뜨려보길 권한다. 한바탕 유쾌한 소동이 지나간 뒤, 당신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사랑과 인간 이해에 대한 잔잔한 여운이 남을 것이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라는 거대한 산맥을 탐험하는 즐거운 첫걸음이 될 수도 있고, 이미 그의 세계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안겨줄 수도 있다. 지금 바로, 이 매혹적인 ‘헛소동’의 세계로 빠져들어 보시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