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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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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시대의 폭풍을 정면으로 마주 선 벌거벗은 영혼의 절규, <리어왕>을 다시 읽다 고전,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왜 읽어야 할까요? 이미 수많은 해석과 논의가 쌓여 있고, 40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때로 높은 장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셰익스피어를 찾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시대를 초월한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리어왕>은 단연 압도적인 비극의 무게로 우리를 짓누릅니다. 한 인간의 오만과 어리석음이 어떻게 개인의 파멸을 넘어 한 세계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이토록 처절하게 그린 작품은 드물 것입니다. 이번에 출간된 <리어왕> 번역본은 바로 이 거대한 비극의 심연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충실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입니다. <리어왕>의 이야기는 고대 브리튼의 늙은 왕 리어가 왕국을 세 딸에게 나누어주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는 딸들의 효심을 말로써 증명하라는 어리석은 시험을 내걸고, 진실한 막내딸 코델리아 대신 아첨하는 두 딸 고너릴과 리건에게 권력을 넘겨줍니다. 옮긴이의 번역은 이 운명적인 첫 장면부터 극의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리어: 이제 나의 깊은 뜻을 밝히겠다. 지도를 가져오너라. 들어라, 내가 왕국을 셋으로 나누었다. 나이 든 몸에서 모든 책임과 걱정을 벗어던지고 젊은이들에게 맡기려 한다. 그리하여 짐 없이 편안히 죽음을 맞으려 하노라. ...딸들이여, 이제 내가 통치권과 영토와 국가의 책임을 모두 벗어던지려 하니, 너희 중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지 말해보거라. 나는 가장 큰 은혜를 자연스런 사랑이 가장 큰 자에게 주리라. 맏딸 고네릴, 먼저 말하거라. 고네릴: 아버지, 제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시력이나 자유, 이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 더 귀하게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생명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요. ... 그 어떤 것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코델리아 (혼잣말):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사랑하되 침묵하리라. ... 코델리아: 불행하게도 저는 마음속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제 의무에 따라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리어: 뭐라고, 코델리아? 말을 고쳐라. 그러다 네 운명을 망칠라. ...아무것도 없는 데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보아라. 이 대목에서 우리는 권력자의 오만과 진실을 외면한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예감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Nothing will come of nothing)"는 리어의 일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모든 것을 잃고 '무(nothing)'의 상태로 내몰릴 것임을 암시합니다. 코델리아의 정직한 "아무것도요"는 말로 포장된 허울 좋은 사랑이 아닌, 진실된 마음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리어는 이를 간파하지 못합니다. 번역은 이러한 인물 간의 대립과 심리적 갈등을 명료하고 힘 있는 우리말로 풀어내어 독자들이 극 초반부터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리어왕의 비극은 글로스터 백작 가문의 이야기와 맞물려 더욱 증폭됩니다. 글로스터 역시 적자 에드거의 진실됨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생아 에드먼드의 간계에 넘어가 에드거를 내쫓습니다. 에드먼드의 저 유명한 독백, "자연이여, 당신은 나의 여신! 당신의 법에 나는 충성을 바친다."는 기존 질서와 도덕을 부정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인물의 의지를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두 아버지의 어리석음은 결국 그들 자신뿐 아니라 주변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도화선이 됩니다. 권력과 사랑을 모두 잃고 황야로 내쫓긴 리어왕은 폭풍우 속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절규는 자연의 폭풍과 내면의 폭풍이 공명하는 <리어왕>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리어: 불어라, 바람들아! 뺨이 터지도록 불어라! 분노하라! 불어라! 폭포와 태풍들아, 쏟아부어라! 우리의 첨탑을 적시고 풍향계를 익사시킬 때까지! ... 모든 것을 뒤흔드는 천둥아, 세상의 두꺼운 둥근 배를 납작하게 만들어라! 자연의 틀을 깨뜨리고, 모든 씨앗을 한꺼번에 쏟아내어 배은망덕한 인간을 만들지 못하게 하라! 이 격렬한 대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분노와 절망을 담고 있습니다. 번역은 셰익스피어 특유의 장엄한 시적 언어를 살리면서도 현대 독자들이 그 감정의 파고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다듬어졌습니다. 리어의 광기는 단순한 정신착란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처절한 항변이자 투쟁입니다. 그는 가장 비천한 존재로 전락한 후에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본질, 즉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인간은 너같이 가엾고, 벌거벗고, 두 갈래로 갈라진 동물일 뿐이다"라는 뼈아픈 진실과 마주합니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을 남김없이 보여줍니다. 자식들의 배신, 충신의 고난, 무고한 자들의 희생은 독자들에게 깊은 슬픔과 함께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안겨줍니다. 글로스터가 두 눈을 뽑히는 장면의 잔혹함, 코델리아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비극의 절정은 그 어떤 위안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리어왕이 코델리아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은 문학사상 가장 비통한 순간으로 꼽힙니다. 리어: 울어라, 울어라, 울어라, 울어라! 오, 너희는 돌 같은 인간들이구나. 내게 너희 혀와 눈이 있었다면 하늘의 둥근 지붕이 갈라지도록 썼을 텐데. 그녀는 영원히 가버렸다! ... 내 가여운 바보가 교수형을 당했구나! 안돼, 안돼, 생명이 없어! 왜 개와 말과 쥐는 생명이 있는데 너는 숨 한 번 쉬지 못하니?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절대! (Never, never, never, never, never!)"라는 반복은 그 어떤 설명보다 강력하게 상실의 고통과 절망의 깊이를 전달합니다. 이처럼 <리어왕>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보다는, 고통의 의미와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셰익스피어가 당대와 현대를 관통하며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정의는 존재하는가? 선은 언제나 승리하는가? 인간은 고통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 번역본은 셰익스피어의 복잡하고 심오한 세계를 우리말로 충실히 옮기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원문의 운문과 산문의 조화, 생생한 이미지와 상징,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들의 심층 심리를 세밀하게 포착하여 전달하려는 고민이 엿보입니다. 번역가는 단순한 텍스트 변환을 넘어, 셰익스피어가 의도한 극적 긴장감과 시적 아름다움을 한국 독자들에게 최대한 가깝게 전달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각주나 해설이 아닌 본문 자체의 힘으로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도록 한 편집 방향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도, 혹은 이미 여러 번역본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리어왕>은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삶의 비극성에 대한 깊은 성찰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이 번역본은 그 묵직한 감동을 오롯이 느끼게 해 줄 좋은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혼돈과 광기, 배신과 잔혹함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성의 불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듯한 처절한 외침을 통해 우리는 400년 전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세계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강렬한 지적, 정서적 경험을 원하신다면, 이 책을 통해 <리어왕>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 보시길 권합니다. 이 한 권의 책이 당신의 서가에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인간이라는 영원한 수수께끼를 탐구하는 여정에 동참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