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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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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셰익스피어의 유쾌한 반란, 혹은 일상 속 통쾌한 복수극 - 『윈저의 명랑한 아내들』을 펼치며 셰익스피어, 하면 으레 ‘햄릿’의 고뇌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사랑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의 4대 비극이 드리우는 묵직한 그림자는 워낙 강렬해서, 때로는 셰익스피어가 당대 최고의 코미디 작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그런데 여기, 그의 희극 중에서도 가장 유쾌하고 현실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윈저의 명랑한 아내들』이 새로운 번역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이 작품, 과연 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웃음과 의미를 선사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아니,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대 서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즐거운 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극의 중심에는 한때 용맹했으나 이제는 뚱뚱하고 허풍만 남은 기사, 존 팔스타프 경이 있다. 그는 헨리 4세의 친구이자 방탕한 왕자의 술친구로 역사극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윈저라는 작은 마을에서 두 유부녀, 포드 부인과 페이지 부인에게 동시에 연애편지를 보내며 돈푼이나 뜯어내려는 얄팍한 수작을 부린다. 팔스타프: (편지를 읽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묻지 마시오. 사랑이 이성을 의사로 삼을지언정 상담자로는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당신도 젊지 않고 나도 마찬가지. 자, 여기 공감대가 있지요. 당신은 명랑하고 나도 그렇습니다. 하하! 더 큰 공감대가 있군요. 당신은 셰리주를 좋아하고 나도 그렇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공감대가 있겠습니까? 페이지 부인, 적어도 한 군인의 사랑으로 만족하신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충분하시기를. "나를 불쌍히 여기시오"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군인다운 말이 아니니까요. 다만 "나를 사랑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당신만의 진실한 기사, 낮이든 밤이든, 어떤 빛 아래서든,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위해 싸우는 존 팔스타프' 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능글맞은 유혹인가! 하지만 우리의 ‘명랑한 아내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들은 팔스타프의 속셈을 간파하고 그를 골탕 먹이기 위한 작전을 꾸민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소동과 오해, 그리고 기상천외한 복수극이 이 희극의 주된 재미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이 두 여성 캐릭터, 포드 부인과 페이지 부인에게 있다. 그들은 단순한 희극적 인물을 넘어, 남성 중심 사회였을 엘리자베스 시대에 보기 드문 주체성과 지혜를 보여준다. 팔스타프의 수작에 분개하면서도, 그를 역으로 이용해 남편들의 질투심을 시험하고 자신들의 명예를 지켜내는 모습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페이지 부인: 어머, 내 아름다운 시절엔 연애편지 따위 피해 다녔는데, 이제 와서 그런 편지의 대상이 되다니! (...) 이 얼마나 헤롯왕 같은 작자인가! 오, 사악하고 음흉한 세상이여! 나이 들어 거의 쇠약해진 자가 젊은 호색한 행세를 하다니! 포드 부인: 어떻게 복수해야 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희망을 품게 해서 정욕의 사악한 불이 그를 자기 기름으로 녹일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이런 일 들어보신 적 있어요? 페이지 부인: 글자 하나하나가 똑같아요! 페이지와 포드라는 이름만 빼고는요! (...) 우리 둘을 넣으려고 하니까 인쇄기에 뭘 넣든 상관없겠지요. 차라리 거인이 되어 펠리온 산 아래 눕고 싶어요. 두 부인의 재치 넘치는 대사와 발칙한 계획은 극을 생동감 있게 이끌어간다. 특히 팔스타프를 빨래 바구니에 숨겨 강물에 던져 버리는 장면이나, 브렌트포드의 뚱뚱한 마녀로 변장시켜 내쫓는 장면은 희극적 과장의 극치를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다. 이러한 소동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 당시 영국 중산층 가정의 일상과 그들의 도덕관념, 사회적 관계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한편, 포드 부인의 남편 포드는 셰익스피어 희극에 자주 등장하는 ‘질투에 눈먼 남편’의 전형이다. 그는 아내의 정숙함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소동을 일으키지만, 결국 아내의 지혜 앞에 무릎 꿇고 만다. 그의 광적인 질투는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 동시에, 아내들의 영리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포드: (혼잣말) 이 빌어먹을 에피쿠로스 학파 악당은 뭐야! 내 심장이 조급함으로 터질 것 같아. 누가 이걸 경솔한 질투라고 하는 거야? 내 아내가 그에게 사람을 보냈어. 시간은 정해졌고, 약속은 성사됐어. 누가 이런 생각을 했겠어? 가짜 여자를 둔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지옥인지 봐! 내 침대는 더럽혀지고, 내 금고는 털리고, 내 명성은 갉아먹힐 거야. 이처럼 『윈저의 명랑한 아내들』은 단순한 소동극을 넘어, 당대 사회의 단면과 인간 본성에 대한 셰익스피어 특유의 통찰이 번득인다. 돈에 대한 욕망, 부부간의 신뢰와 질투, 사회적 평판에 대한 갈망, 젊은 남녀의 사랑과 결혼 문제 등은 시대를 초월해 공감을 자아낸다. 특히 앤 페이지를 둘러싼 세 명의 구혼자 ? 어수룩한 시골 신사 슬렌더, 허풍쟁이 프랑스 의사 카이우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젊은 귀족 펜튼 ? 의 이야기는 극에 또 다른 재미를 더하며, 진정한 사랑과 조건적인 결혼 사이의 고민을 보여준다. 번역은 언제나 도전이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와 시적인 리듬, 그리고 400년 전의 사회상을 현대 한국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도록 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이 번역본은 원작의 생동감과 유머를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입에 착 감기며, 상황 묘사는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다. 예를 들어, 웨일스 출신 목사 휴 에번스의 어색한 영어 발음이나 프랑스 의사 카이우스의 과장된 말투는 번역에서도 그 특징을 살리려 애썼고, 이는 희극적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에반스: 의회에서 심리해야 할 사안이오. 이건 폭동이라고! 에반스: 의회에서 폭동 사건을 다루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폭동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거든요. 의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듣고 싶어 하지, 폭동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카이우스: 으악, 그는 세상에서 가장 겁쟁이 잭 사제야. 얼굴도 안 보여줘. 이러한 외국인 캐릭터들의 어투는 당시 런던의 국제적인 면모와 함께, 타자에 대한 시선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번역 과정에서 이러한 미묘한 뉘앙스를 완전히 살리는 것은 어렵지만, 독자들은 각주나 해설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400년 전 영국 시골 마을의 이야기를 읽어야 할까?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희극적 상황과 그 속에 담긴 감정들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사랑과 질투, 허영과 복수, 오해와 화해라는 보편적인 주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때로는 날카롭게 풍자하고, 때로는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으며 무대 위에 펼쳐 보였다. 『윈저의 명랑한 아내들』은 셰익스피어의 심오한 비극에 지친 독자들에게, 혹은 셰익스피어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즐거운 입문서가 될 수 있다. 복잡한 현실을 잠시 잊고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는 동시에, 웃음 뒤에는 인간관계의 본질과 삶의 지혜에 대한 성찰도 담겨 있다. 명랑한 아내들의 통쾌한 복수극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활기찬 세계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고전이 결코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유쾌한 소동극에 동참하여 셰익스피어가 선사하는 웃음과 지혜를 만끽해보길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