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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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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견뎌낸 이야기, 마침내 피어나는 용서와 화해의 기적
셰익스피어.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장르가 되는 작가다.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400년 전 인간의 고뇌와 환희를 현재로 불러와 우리 삶의 좌표를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겨울 이야기’라니.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걸작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어쩌면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이름일지 모른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암시하는 듯한 이 ‘겨울’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봄을 약속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만년에 이르러 도달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고 너그러운 성찰을 담은, 그의 로맨스극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보석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손에 쥔 이 번역본은 그 눈부신 보석의 결을 섬세하게 어루만져 한국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하려는 진지한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겨울 이야기’는 참으로 기이한 구조를 가졌다. 극의 전반부는 레온테스 왕의 광기 어린 질투로 인해 파멸하는 한 가정과 왕국의 비극을 숨 막히게 그려낸다. 마치 ‘오셀로’의 질투가 시칠리아 궁정에 옮겨온 듯하다. 그러나 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무려 16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버려진 공주 페르디타가 성장한 보헤미아의 목가적인 풍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시간의 도약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시간’이라는 인물을 직접 무대에 등장시켜 이 거대한 간극의 의미를 설파한다. 시간 어떤 이는 기뻐하고 어떤 이는 시험에 들게 하며 선악의 기쁨과 공포를 주고, 잘못을 만들기도 바로잡기도 하는 나, 시간이 이제 내 날개를 펼쳐 십육 년이라는 긴 세월을 훌쩍 뛰어넘으리라. 이 거대한 시간의 틈을 그대로 둔 채 빠르게 지나쳐 가는 나를 탓하지 말라. (4막 1장, 시간의 합창 중) 이 대담한 선언처럼, ‘겨울 이야기’는 파괴적인 감정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상처가 치유되고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과정을 장엄하게 펼쳐 보인다. 비극으로 시작하여 희극적 화해로 나아가는 이 여정이야말로 셰익스피어 로맨스극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의 비극적 씨앗은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의 마음속에서 싹튼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오랜 친구인 보헤미아 왕 폴릭세네스와 자신의 아내 헤르미오네 왕비의 순결을 의심하는 그의 질투는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치닫는다. 셰익스피어는 레온테스의 독백을 통해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연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레온테스 (방백) 너무 뜨거워, 너무 뜨거워! 우정을 멀리 섞는 것은 피를 섞는 것과 같다. 내 심장이 떨리고 있어. 내 심장이 춤을 추지만 기쁨 때문이 아니야, 기쁨이 아니야. … 오, 그런 대접은 내 가슴도, 내 이마도 좋아하지 않아. 마밀리우스, 너는 내 아들이지? 마밀리우스 그렇습니다, 아버지. 레온테스 그렇지! 그래, 내 귀여운 녀석. 어? 코에 뭐가 묻었네? … 그런데 수소, 암소, 송아지를 모두 '깔끔하다'고 부르지. ?아직도 그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고 있나?? 어이, 이 방탕한 송아지야! 너는 내 송아지냐? (1막 2장 중) ‘너무 뜨거워, 너무 뜨거워!’라는 외침은 그의 이성이 질투의 불길에 잠식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들 마밀리우스를 향한 애정과 의심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말들은 그의 정신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번역은 레온테스의 급박하고 불안정한 심리를 생생하게 전달하며, 셰익스피어 특유의 블랭크 버스(무운시)가 지닌 극적 긴장감을 한국어로 잘 살려내고 있다. 그의 광기는 결국 사랑하는 아내를 감옥에 가두고, 갓 태어난 딸 페르디타를 황무지에 버리게 하며, 아들 마밀리우스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다. 헤르미오네 왕비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결백을 당당히 주장하지만, 레온테스는 델포이 신탁마저 부정하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헤르미오네 … 나리, 당신께서 가장 잘 아시죠. 그러기를 가장 꺼려하시겠지만, 제 과거 삶은 지금의 불행만큼이나 절제 있고, 순결하고, 진실했습니다. … 삶에 대해서는, 제가 슬픔을 헤아리듯 소중히 여기는데, 그 슬픔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명예에 대해서는, 그것은 저에게서 제 후손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며, 오직 그것만을 위해 서 있습니다. … 만약 제가 추측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다른 모든 증거는 잠들어 있고 오직 당신들의 질투만 깨어있다면, 그것은 엄격함이지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모든 명예에 저는 호소합니다. 신탁에 맡기겠습니다. 아폴론이 저를 심판하소서! (3막 2장 중) 이처럼 무고한 왕비의 절규와 위엄 있는 항변은 독자들의 마음을 깊이 울린다. 이 번역본은 헤르미오네의 고결함과 논리정연한 변론을 격조 높은 언어로 옮겨, 그녀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연민을 극대화한다. 레온테스의 겨울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그는 깊은 참회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16년의 세월이 흐른다. 무대는 보헤미아의 푸른 초원으로 바뀌고, 우리는 양치기의 딸로 자란 페르디타를 만난다. 그녀는 보헤미아의 왕자 플로리젤과 순수한 사랑을 키워가고 있다. 특히 4막 4장의 양털깎이 축제 장면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목가적 풍경 중 하나로 꼽힌다. 여기서 페르디타가 손님들에게 꽃을 나눠주며 건네는 대사들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젊음의 생명력을 찬미하는 한 편의 시와 같다. 페르디타 나리, 해가 저물어가고 아직 여름이 죽지도 않았고 떨리는 겨울이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이 계절의 가장 아름다운 꽃들은 우리의 카네이션과 줄무늬 길리플라워입니다. … 여기 당신들을 위한 꽃들이 있어요. 뜨거운 라벤더, 박하, 세이보리, 마조람, 해와 함께 잠들었다가 해와 함께 울며 일어나는 금잔화. 이것들은 한여름 꽃들이고 중년의 남성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정말 환영합니다. [플로리젤에게] 이제, 가장 아름다운 친구여, 당신들의 시간에 어울릴 봄꽃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 오, 프로세르피나여, 지금 당신이 두려워서 디스의 수레에서 떨어뜨린 꽃들로부터! 제비보다 먼저 와서 삼월의 바람을 아름답게 맞는 수선화, 희미한 제비꽃이지만 유노의 눈꺼풀보다 키테레아의 숨결보다 더 달콤한 것… (4막 4장 중) 이 번역은 페르디타의 청초함과 지혜, 그리고 꽃에 담긴 상징적 의미들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마치 독자 자신이 그 향기로운 축제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잃어버린 희망이자 다가올 화해의 전조인 것이다. 물론 이들의 사랑에도 시련은 닥친다. 플로리젤의 아버지 폴릭세네스 왕이 신분을 숨기고 나타나 아들의 사랑을 격렬히 반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충신 카밀로의 지혜와 떠돌이 사기꾼 오토리쿠스의 유머러스한 활약에 힘입어 이야기가 다시 한번 극적인 전환을 맞이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침내 이야기는 다시 시칠리아로 돌아온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연극사상 가장 경이로운 장면 중 하나인, 폴리나의 집에 보관된 헤르미오네의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기적이 펼쳐진다. 이 장면은 단순한 해피엔딩을 넘어, 오랜 고통과 참회를 통한 영혼의 구원, 그리고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여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르네상스적 세계관까지 담아낸다. 폴리나의 강인한 믿음과 연출 아래, 16년간 죽은 줄로만 알았던 헤르미오네가 레온테스와 페르디타 앞에 다시 나타나는 순간, 독자들은 숨 막히는 감동과 함께 정화되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폴리나 음악이여, 그녀를 깨워라. 시작해! [음악] 때가 왔다. 내려와라. 더 이상 돌이 되지 마라. 다가와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경이로움으로 치라. 오라. 네 무덤을 메우리라. 움직여라. 아니, 이리 와라. 죽음에게 네 무감각을 물려주어라. 그에게서 소중한 생명이 너를 구원한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구나. [헤르미온느가 받침대에서 내려온다.] 놀라지 마라. 그녀의 행동은 내 주문이 합법적인 것처럼 거룩할 것이다. (5막 3장 중) 이 마지막 장면의 연극적 힘은 실로 대단하다. ‘음악’과 함께 조각상이 생명을 얻는다는 설정은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힘이 만들어내는 기적을 상징한다. 이 번역본은 원문의 시적 리듬과 극적 분위기를 충실히 살려내어, 마치 우리가 글로브 극장의 관객이 되어 이 놀라운 순간을 목격하는 듯한 생생함을 선사한다. ‘겨울 이야기’는 질투라는 파괴적인 감정이 한 인간과 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그리고 그 상처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치유되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새로운 희망으로 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심오한 드라마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두움과 밝음, 운명의 잔혹함과 은총,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과 용서의 위대한 힘을 이야기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후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봄의 가치를 아는가? 상실의 고통을 겪어본 자만이 진정한 회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아는가? 이 번역본은 셰익스피어의 복잡한 문체와 깊이 있는 사상을 현대 한국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다듬어졌다. 운문과 산문의 적절한 조화,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의 대사, 그리고 극 전체를 관통하는 시적 아름다움은 원작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셰익스피어 전문가의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번역과 윤문은 이 고전이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말을 거는 살아있는 텍스트임을 깨닫게 한다. 혹시 셰익스피어가 어렵고 지루한 작가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겨울 이야기’를 통해 그 오해를 풀 기회를 가져보길 권한다. 당신은 아마도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탐험하는 그의 놀라운 통찰력과,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드는 그의 이야기의 힘에 매료될 것이다.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당신의 마음에도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볕이 스며드는 듯한 감동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 기적 같은 화해의 드라마를, 이 아름다운 번역으로 만나보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 겨울의 끝에서 당신은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되찾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