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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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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시대를 초월한 리더십의 교본,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를 다시 읽는다 우리는 왜 고전을 읽는가? 낡고 해묵은 이야기에서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아마도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본성과 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한 통찰일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헨리 5세』는 바로 그러한 통찰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순한 옛 군주의 영웅담을 넘어, 이 작품은 리더십의 본질, 국가 공동체의 의미, 그리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고뇌하고 결단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새로운 번역본은 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셰익스피어의 목소리를 우리 곁으로 더욱 가까이 데려다 놓는다. 『헨리 5세』는 방탕했던 청년 시절을 뒤로하고 왕위에 오른 헨리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위대한 군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순한 애국주의적 영웅 서사로만 읽는다면, 셰익스피어가 던지는 깊은 질문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헨리라는 인물을 통해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과 함께 그 이면에 숨겨진 고독과 책임의 무게, 때로는 냉혹함까지 다층적으로 조명한다.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는 단연 헨리 5세의 연설들이다. 그의 말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특히 아쟁쿠르 전투 전날 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왕은 평범한 병사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진중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솔직한 심정을 듣는다. 헨리 왕: 그렇다면, 아버지가 상업 일로 보낸 아들이 바다에서 죄 많게 죽는다면, 당신 논리로는 그 악행의 책임이 그를 보낸 아버지에게 지워져야 하겠군. … 왕은 병사들의 특정한 최후에 대해 답할 의무가 없어. … 모든 신하의 의무는 왕의 것이지만, 모든 신하의 영혼은 그 자신의 것이야. 이 대목에서 헨리는 왕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죄와 구원의 문제는 각자의 몫임을 분명히 하며, 동시에 병사들 각자가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전투에 임해야 함을 역설한다. 이는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인간적 고뇌를 이해하는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유명한 '성 크리스핀 축일 연설'이 터져 나온다. 헨리 왕: 이 날은 크리스핀의 축제라고 불린다. 이 날을 견뎌내고 안전히 집에 오는 자는 이 날이 불릴 때마다 발끝으로 서서 크리스핀의 이름에 자신을 분발시킬 것이다. … 우리 소수, 우리 행복한 소수, 우리 형제의 무리여. 오늘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 것이다. 그가 아무리 비천할지라도, 이 날이 그의 신분을 고귀하게 할 것이다. 이 연설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병사들에게 명예와 형제애라는 가치를 제시하며 불굴의 용기를 불어넣는다. 단순한 승리를 넘어,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 번역본은 헨리의 웅변을 현대적이면서도 힘 있는 우리말로 잘 살려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아쟁쿠르 전투 직전의 병사가 된 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셰익스피어는 또한 '코러스(해설자)'라는 독특한 장치를 통해 극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시도한다. 코러스는 무대의 물리적 제약을 인정하면서도, 관객의 상상력에 호소하여 광활한 전장과 시간의 흐름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유도한다. 코러스: 아, 불타는 영감의 뮤즈여! 창조의 가장 높은 하늘로 솟아올라 온 왕국을 무대로 삼고, 왕자들을 배우로 세우고 임금들이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게 하소서! … 하지만 용서하소서, 여러분! 이 보잘것없는 무대 위에서 감히 이토록 위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려는 초라하고 우둔한 우리들을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이 좁디좁은 무대가 어찌 프랑스의 광활한 들판을 담겠습니까? 코러스의 이러한 호소는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이 지닌 본질적인 약속, 즉 배우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상상의 세계를 강조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코러스의 안내에 따라 헨리 5세의 여정을 함께하며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전쟁의 영광만을 찬양하지 않는다. 하플뢰르 공성전에서 헨리가 시민들에게 항복을 종용하며 내뱉는 위협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헨리 왕: 자비의 문은 모두 닫히고, 피에 굶주린 거칠고 무정한 병사가 피 묻은 손의 자유를 만끽하며 지옥처럼 넓은 양심으로 활개 치며 당신들의 싱싱한 처녀들과 꽃다운 어린아이들을 풀 베듯 베어 나갈 것이오. … 당신들 자신이 원인이 되어 당신들의 순결한 처녀들이 뜨겁고 강제적인 폭력의 손에 떨어진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오? 이는 전쟁의 참혹함과 승리를 위해 때로는 비정해져야 하는 군주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또한, 옛 동료였던 바돌프가 절도죄로 교수형에 처해지는 장면에서는, 사사로운 정보다 공적인 정의와 군율을 우선시해야 하는 왕의 고독이 엿보인다. 플루엘렌 대위가 바돌프의 처형을 왕에게 보고하는 장면은 무심한 듯하지만, 왕의 심경을 짐작케 한다. 플루엘렌: 그의 코는 처형당했고, 불은 꺼졌어요. 헨리 왕: 우리는 그런 범죄자들을 모두 그렇게 제거하길 바라노라. 셰익스피어는 피스톨, 님, 바돌프와 같은 희극적 인물들과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교들을 등장시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동시에, 당시 영국의 다양한 인간 군상과 국민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플루엘렌의 고지식함과 독특한 말투는 극의 재미를 더하며, 그의 충성심은 또 다른 형태의 영국인다움을 제시한다. 플루엘렌: 예수님께 맹세코, 그는 세상에서도 바보예요. 그의 면전에서 그만큼 확실히 말해주겠어요. 그는 로마 군기에 따른 진정한 전쟁 규칙에 대해서는 강아지만도 못한 지침을 갖고 있어요. 이처럼 다양한 목소리들은 『헨리 5세』를 단순한 군주 중심의 서사가 아닌, 여러 계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역사의 드라마로 확장시킨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공주 캐서린과의 로맨스 장면은 전쟁의 피로와 긴장감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유쾌함을 선사한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헨리와 캐서린의 모습은, 국가 간의 갈등을 넘어선 인간적인 교감과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영어를 잘 못하는 캐서린에게 서툰 프랑스어로 구애하는 헨리의 모습은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헨리 왕: 케이트, 제게는 왕국을 정복하는 것이 프랑스어를 그만큼 더 하는 것만큼 쉬워요. 저를 비웃게 하는 게 아니면 프랑스어로는 절대 당신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거예요. 캐서린: 죄송하지만, 폐하께서 하시는 프랑스어가 제가 하는 영어보다 낫네요. 이 번역본은 셰익스피어 특유의 시적 운율과 극적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현대 한국 독자들이 헨리 5세의 고뇌와 결단, 그리고 그 시대의 함성에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한다. 『헨리 5세』는 단순한 영웅 찬가가 아니다. 그것은 리더십의 무게, 전쟁의 다면성, 국가 공동체의 의미, 그리고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시대를 초월한 고전이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이 작품을 일독하기를 강력히 권한다. 마치 헨리 5세가 외쳤던 것처럼, 이 책을 통해 독자들 역시 "우리 소수, 우리 행복한 소수"의 일원이 되어 셰익스피어가 펼쳐 보이는 장대한 드라마와 지혜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