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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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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뜨거운 파멸의 기록 혹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 권력이냐, 사랑이냐.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갈등은 수많은 이야기의 씨앗이 되어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이 해묵은 질문을 가장 화려하고도 비극적인 방식으로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4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 앞에 도착한 이 이야기는,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어쩌면 우리는 이 거대한 로맨스 비극 속에서 가장 현대적인 인간 군상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로마의 삼두정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로마의 질서와 명예, 정치적 야망, 심지어 동지애까지. 그의 몰락은 단순히 한 영웅의 개인적인 타락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것은 거대한 제국의 운명과 개인의 욕망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파국의 서사이며, 동시에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한 본능적인 끌림과 이성적인 통제 사이의 영원한 투쟁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첫 장면부터 필로의 대사는 안토니우스의 변화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필로 아니, 우리 장군의 이 노망은 도를 넘어섰다. 전쟁의 대열과 집결지를 황금빛 마르스처럼 빛나며 내려다보던 그 고결한 눈동자가, 이제는 굽어져서 그 시선의 충성과 정성을 황갈색 얼굴에 바치고 있다. 격전 중에 가슴팍의 갑옷 띠를 터뜨리던 그 대장의 심장이 이제는 모든 절제를 포기하고 집시 여인의 욕정을 식혀주는 풀무와 부채가 되고 말았다. ‘노망’, ‘황갈색 얼굴에 바치는 충성’, ‘집시 여인의 욕정을 식혀주는 풀무와 부채’. 이 얼마나 신랄하고도 정확한 묘사인가. 한때 전쟁의 신 마르스와 같았던 장군이 사랑에 눈멀어 ‘창녀의 바보’로 전락해가는 모습은, 시대를 막론하고 강력한 권력자조차 비켜갈 수 없는 인간적 나약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뉴스에서, 혹은 주변에서 비슷한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 접했던가.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모든 것을 잃는 사람들. 안토니우스는 그들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클레오파트라는 또 어떤가. 그녀는 단순한 요부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입체적이고 매혹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파멸로 이끄는 장본인이면서도, 동시에 그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녀의 변덕과 질투, 교활함과 연약함은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녀만의 생존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안토니우스에게 던지는 도발적인 대사들은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격정적이고 불안정한지를 보여준다. 클레오파트라 정말 사랑이라면, 얼마나 큰 사랑인지 말해보세요. 안토니우스 헤아릴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건 거지 같은 사랑이오. 클레오파트라 사랑받을 한계를 정해놓겠어요. 안토니우스 그렇다면 당신은 새 하늘, 새 땅을 찾아야 할 것이오. ‘헤아릴 수 있는 사랑은 거지 같은 사랑’이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이면서도 위험한 선언인가.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모든 규범과 한계를 초월하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파멸을 향해 질주한다. 이 번역본은 이러한 인물들의 격렬한 감정과 대사의 맛을 현대적인 어투로 잘 살려내고 있어, 마치 눈앞에서 연극을 보는 듯한 생생함을 전달한다. 특히 에노바르부스가 묘사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첫 등장은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다. 안토니우스의 충직한 부하지만 냉철한 관찰자이기도 한 그의 입을 통해, 우리는 클레오파트라의 초인적인 매력을 실감하게 된다. 에노바르부스 그녀가 탄 배는 윤이 나는 왕좌처럼 물 위에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고물은 황금으로 쳐져 있었고, 돛은 자주색이었는데 너무나 향기로워서 바람이 그것들과 사랑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노는 은빛이었는데, 피리 소리에 맞춰 젓는 그 소리가 그들이 치는 물을 더 빨리 따라오게 했습니다. 마치 그 노질에 반한 듯이 말입니다. 그녀 자신의 모습은 모든 묘사를 궁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금직물로 된 천막에 누워 있었는데, 우리가 보는 비너스보다도 더 아름다워서 상상이 자연을 능가하는 듯했습니다. 이처럼 화려하고 관능적인 묘사는 클레오파트라가 단순한 미모를 넘어선, 거의 신적인 아우라를 지닌 존재임을 암시한다. 안토니우스가 이 거부할 수 없는 매혹에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번역은 이러한 시적 이미지를 섬세하게 포착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리는 왜 400년 전 로마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이 사랑 이야기에 여전히 매혹될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 앞의 나약함, 사랑의 맹목성, 자존심과 허영, 질투와 후회 등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주제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안토니우스가 느끼는 로마에 대한 의무감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열정 사이의 갈등은, 어쩌면 현대인이 겪는 일과 개인적인 삶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과도 다르지 않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운문과 산문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인물들의 신분과 감정 상태, 극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귀족들의 대화는 장엄한 무운시로 표현되는 반면, 하층민이나 희극적 인물들은 현실적인 산문으로 이야기한다. 이러한 문체의 변화는 극에 리듬감과 생동감을 부여하며, 번역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살리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 번역본은 원문의 시적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여, 독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언어적 유희와 깊이를 비교적 쉽게 음미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것은 때로 인내를 요구한다. 방대한 은유와 상징, 낯선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관습들은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장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장벽을 넘어섰을 때, 우리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번역본은 그 여정에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작가 소개’나 ‘작가 연보’와 같은 부가 자료들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지식을 제공하며,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결국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성, 화려한 영광과 처절한 몰락이 교차하는 인간 드라마의 정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이 두 거대한 별은 서로를 격렬하게 끌어당기다 장렬하게 부서져 내린다. 그들의 사랑은 세상을 뒤흔들 만큼 강력했지만, 동시에 그들 자신을 파괴할 만큼 위험했다. 이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들의 뜨거운 파멸의 기록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숨겨진 욕망과 갈등, 그리고 선택의 무게를 되새겨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을 덮고 난 후에도, 한동안 그들의 강렬한 사랑과 비극적인 운명의 잔상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셰익스피어가 지닌, 시간을 초월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