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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강윤정_ 이제는 없는, 이 아래 묻힌 김민채_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 김소연_ 시장, 사소하게 완벽해지는 장소 김혜나_ 나를 바라보는 나 박연준_ 호텔에 대한 크고 둥근 시선 성미정_ 아련하다, 오늘 신해욱_ 거기, 없는 길의 흔적 오지은_ 핀란드, 네가 없었다면 요조_ 노란 횟집 위서현_ 가을날의 환상-떠났으나 떠나지 않은 이대범_ 빨래 이우성_ 두 개의 풍경 이제니_ 어두운 밝은 방 장연정_ 창문을 열고 정성일_ 오즈, 만춘 그리고 교토 정혜윤_ 소리와 고독 사이에 흐르는 빛의 오르가즘 최상희_ 떠나간 고양이들의 방 epilogue |
KIM SO 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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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가는 할아버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날랜 손놀림에 감탄사를 추임새처럼 넣으며 한참을, 재봉틀에 앉은 아주머니의 혼잣말들을 응대하며 한참을, 건전지를 갈아주며 시계의 구석구석에 끼인 때까지 말끔하게 세척해주는 아저씨와 마주보며 한참을, 온갖 잡동사니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파는 리어카에서 자잘하지만 꼭 필요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고르면서 한참을. 나는 비로소 가장 사소하게 가장 완벽해진 채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배낭 속에는 아빠가 좋아하시는 샌베이, 알밤과자, 양갱이 들어 있고, 엄마가 좋아하시는 붕어빵과 순대가 뜨끈한 채로 들어 있었다.
--- 김소연 「시장, 사소하게 완벽해지는 장소」 중에서 호텔에서 혼자 자는 밤, 잊고 지내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도착한다. 고아원 복도에 서 있는 느낌. 해 질 무렵 고아원 복도, 멀리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나는 고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고아인 것 같기도. 그런데 여기서 내가 뭘 하는 걸까? 누군가가 보고 싶은데 그게 누군지도 모르겠는 마음. 신산한 마음이 불면을 데려온다. 아련한 향수와 조금의 해방감, 불쑥 고개를 든 두려움. 혼자다. 세상에서.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와서야 겨우 체감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 --- 박연준 「호텔에 대한 크고 둥근 시선」 중에서 결국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적은, 최소한의 불빛일 텐데. 한 줌의 불빛. 인간에겐 언제나 그 최소한의 불빛이 부족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그 결핍을 채우듯 다가올 기미조차 없는 불빛을, 있다고 느껴지는 없는 불빛을, 없다고 느껴지는 있는 불빛을, 미리 끌어당겨서 살아간다. 마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면서. 내내 견디면서. 하나의 시詩를 증명하듯이. 끝간 데 없이 반복, 반복해가면서. 죽을 때까지. 죽고 나서도. --- 이제니 「어두운 밝은 방」 중에서 나는 투명하고 조용한 헬싱키에서 사실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내 지도를 실컷 바라보고 오려고 맞춰보았다. 그 과정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더럽게 외로웠다. 그 와중에 3집에 실릴 노래를 몇 곡 썼다. [네가 없었다면]이라는 노래는 3집의 첫 트랙이 되었다. 이 노래는 어쩌면 헬싱키에 가지 않았으면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노래가 없었다면 3집은 저런 모양으로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헬싱키에 가는 게 맞았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곧바로 「네」라고 대답할 순 없겠지만 그때의 내가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 얻을 수 있던 것이 있었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조금 늦게 하지만 분명히 「네」라고 대답할 것이다. 모든 여행은 떠나보지 않으면 모른다. --- 오지은 「핀란드, 네가 없었다면」 중에서 그래도 모래언덕의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 보면 내가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모래언덕은 반걸음씩만 뒤로 물러났던 것 같다. 측량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모래와 사람 사이의 진짜 거리를 재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내 앞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다녀갔을 텐데도 모래언덕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내 흔적도 그럴 것이었다. 미리 나 있는 길은 없었다. 앞으로 나게 될 길도 없었다. 앞과 뒤가 사라지는 곳. 나의 발자국을, 아니 모든 발자국을, 유일한 발자국으로 만드는 곳.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바람이 한 차례 불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기에, 시간이 스며들 수 없는 곳. 순간들만이 영원한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곳. --- 신해욱 「거기, 없는 길의 흔적」 중에서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나는 [만춘]의 그 장소에 와보았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무언가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나면서 자꾸만 돌아보았다. 내 시선에서 기요미즈데라가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보고 또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오즈는 기요미즈데라 자체를 찍으러 온 것은 아닐까. 마치 오즈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내가 그것을 느껴보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처럼, 아버지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여기 이렇게 우두커니 머물러 있을 기요미즈데라의 시간을 노리코에게 남겨주기 위해서, 그래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닐까. --- 정성일 「오즈, 만춘 그리고 교토」 중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음악 전곡이 흐르는 가운데 꿈속에서 그와 나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힘차게 춤을 추었고 나는 그를 따라 빙빙 돌기만 했습니다. 그가 나보다 잘 추었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그에게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랑스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꿈속에서 그의 귀에 쉴 새 없이 들려줬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오로라의 찬란한 빛들이 따라다녔습니다. 내가 뱉은 말은 하늘에서 빛으로 된 소리들이었습니다. 물론 꿈에서 깼을 때 나는 그 이야기들을 하나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 정혜윤 「소리와 고독 사이에 흐르는 빛의 오르가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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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조각들, 의미의 덩어리가 되다
장소에 대한 기억은 입체파 화가의 그림을 닮았다. 이쪽에서 본 얼굴, 저쪽에서 본 얼굴이 다르지만 결국 그 조각들이 모여 여인들의 얼굴이 된다. 완전하진 않지만 기이한 형태, 그러나 이쪽에서 본 것도 저쪽에서 본 것도 분명 너와 내가 본 바로 그것이다. 멀리서 내다보았을 때 그것은 한 여인이 되고, 기이함은 이내 아름다움이 된다. 여행의 장소 또한 하나의 순간, 하나의 기억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혹은 네가 보았던 곳, 그때 혹은 지금의 내가 본 곳. 같은 장소를 향유했던 순간들의 조각들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의미의 덩어리가 되고, 아름다움은 그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이우성 시인의 ‘그곳’은 두 여인에 대한 기억으로 단단하게 얽혀 있다. 옛 연인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를 어머니와 다시 찾아가게 되고, 훗날 그곳을 들여다볼 때에는 두 여인이 같은 장소에서 조우한다. 어머니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대목에서는 마치 그의 기억 속에서 함께 꿈을 꾸는 듯하다. 현실에서는 마주하지 못했을 두 여인이 그토록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장소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가 공간에 부여했던 의미들은 서로 만나 뒤섞이고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기억 속 여행의 장소 ‘그곳’은 계속해서 변해갈 것이다. 저쪽에서 바라본 누군가의 기억에 따라, 이쪽에서 여행하는 또다른 나의 기억에 따라.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저쪽의 얼굴을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 지나가버린 곳, 사라진 곳, 가보지 못한 곳, 언젠가 마주할 곳 그 모든 ‘여행, 그곳’을 애틋하게 상상하며 말이다. 저마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여행, 그곳’ 장소는 경험되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공간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공간空間,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특정 공간을 경험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겪음’으로써 공간은 ‘의미’를 부여받고 장소가 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장소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인간다워지는데,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곧, 기억한다는 말이며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행자가 겪었던 공간들은 어떨까? 같은 공간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누가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겪었느냐에 따라 장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여행자가 여행의 장소를 경험하게 되고서야 저마다의 마음속 ‘그곳’으로 자리한다. 장소는 변형되고 왜곡될 수 있지만, 지문처럼 저마다의 고유한 무늬를 갖게 된다. 여행자는 수많은 공간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만의 장소를 만든다. 그러니 여행이란 얼마나 인간적인 것이던가. 어떤 날 4호는 여행의 장소들이 갖는 고유한 무늬에 주목했다. 여행자가 경험했던 특정 공간을 탐미적이고도 관찰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묘지, 시골집, 시장, 호텔방, 타인의 집…… 수많은 장소들이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재구성되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장소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안의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은, 외려 상상에 가깝다.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 어린 상상이 아니라 이미 겪어본 것에 대한 애정 어린 상상, 애틋한 상상. 애틋한 시선으로 다시 빚어낸 장소들은 참 따뜻하다. 어떤 날 4호를 통해 그 온기를 느끼고 자신만의 장소를 떠올린 당신이라면, 지극히도 인간다운 인간이 아닐까 싶다. 당신이 경험했던 ‘여행, 그곳’에 대한 기억. 지금 그곳으로의 가장 인간다운 여행이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