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의 죄인
반점 산적 산가 |
|
항용 문필하는 사람의 마음 한가로움이라고 할까 누그러진 행습이라고 할까, 가까운 친구가 간여하고 있는 잡지사고 출판사고 하면 일이야 있으나마나 달리 소간이 긴급한 때 외에는 그 앞을 그대로 지나치지는 않게 되고 들어가 앉아서는 신문 잡지도 뒤척이고 많이 잡담하고 조금 문담(文談)하고 방담도 싫도록은 하고 하기에 세월을 잊고.
하는 것을 주인편에서는 흔연히 맞이하여 주고 같이 섭쓸려 이야기하고 하되, 한결같이 폐로와하는 법이 없고 출판사나 잡지사의 사무실은 문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이를테면 동네 쇠물방처럼 임의롭고 무관함이 있어 김군이 주간하는 P사도 나의 그런 임의롭고 무관한 자리의 하나였었다. 하루 거리엘 나가면 그래서 출판사나 잡지사를 몇 곳씩은 자연 들르게 되고, 그날도 남대문 밖까지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역시 별 볼일이 있던 것이 아니요 지날녘이고 해서 푸뜩 P사를 들렀던 것인데, 무심코 들르느라고 들렀던 것인데. 김군의 말따나 일수가 매우 좋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 “민족의 죄인” 중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이웃집 처녀에게 하염없는 짝사랑을 해오다가 마침내 젊은 것한테 애인을 빼앗기고 남산을 지향없이 헤매고 있던 한 늙은 호랑이가 한양성을 쌓는 바람에 공주 계룡산을 찾아가다가 때마침 나이 삼십이 넘도록 혼처를 구하지 못하고 비관하던 나머지 목을 매러 산에 올랐던 처녀를 만나서 손에 손을 잡고 멀리 계룡산으로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아갔다는 듣기에도 맹랑한 전설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구혈산(九穴山) 밑 반신불수가 된 느티나무와 호랑이가 처녀와 잔치를 했다는 초례봉 사이로 아담스러운 동리가 하나 있다. 가물에 콩 나듯 감나무와 대추나무 사이로 뜸뜸히 한 채씩 집이 놓여지기는 했을망정 달걀껍데길 재켜놓은 것같이 산잔등이 둘러싸서 그지없이 아늑한 인상을 준다. 집이라고 여남은 채 그러나 실상은 도합 일곱 집이었다. 나머지 세 채는 집이 아니라 건넌마을 김 주사가 억지로 꾸리게 한 거름집이었다. 이 동리가 궁말이다. 전설만은 로맨틱하지마는 실상 구혈산은 하나도 값비싸게 사줄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하다니보다는 차라리 야산이었다. 오직 출입구가 아홉이나 되는 커다란 굴이 산중허리에 있다는 것뿐이다. --- “산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