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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순간들을 위한 봉헌 :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버지니아 울프 연보 |
Adeline Virginia Wo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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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열린 대기 속으로 뛰어들 때면 언제나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고요했던지. 물론 오늘 아침보다도 더 조용했었다. 파도의 찰싹임처럼, 파도의 입맞춤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당시 열여덟 살이던 소녀에게는) 엄숙했다. 거기 그렇게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꽃들과, 나무들과, 나무들을 감돌아 지나가는 연기와, 갈까마귀들이 날아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노라면. 그때 피터 월시가 물었다. 「채소밭 가운데서 명상하는 거야?」 그렇게 말했던가? 「난 꽃양배추보다는 사람들이 더 좋아.」 그렇게 말했던가? 그녀가 테라스에 나갔다 온 어느 날 아침 식사 때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피터 월시. 그가 곧 돌아온다지. 유월, 아니면 칠월? 잊어버렸다. 그의 편지는 지루하기만 했다. 기억나는 것은 그가 한 말이다. 그의 눈, 그의 주머니칼, 그의 미소, 그의 퉁명스러움, 그리고 그 밖에 온갖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마당에, 이상하기도 하지! 양배추에 관한 그 몇 마디 말뿐이다. --- pp.7-8
그러나 ― 그러나 ― 왜 갑자기, 이유도 알 수 없이, 이토록 불행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진주나 다이아몬드를 풀밭에 떨어뜨리고서 풀숲을 이리저리 샅샅이 뒤지며 헛되이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그러다가 풀뿌리 근처에서 겨우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처럼, 그녀는 하나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 그녀의 파티! 아, 바로 그거였다! 그녀의 파티! 피터와 리처드, 두 사람 모두가 그녀를 부당하게 비판하고 부당하게 비웃는 것이다. 파티 때문에. 바로 그거였다! 파티 때문이었다! 글쎄,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일단 이유를 알고 나니 기분은 아주 개운해졌다. 그들은, 적어도 피터는 그녀가 자신을 내세우기를 즐긴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유명한 사람들을 주위에 불러 모으기를 좋아한다고. 명사들을. 한마디로 속물이라고. 뭐, 피터는 그렇게 생각하라지. 리처드는 그녀가 흥분하는 것이 심장에 좋지 않은데 파티를 연다고 해서 걱정하는 것뿐이다. 어린애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틀렸다. 그녀는 단지 삶을 사랑할 뿐이었다. 「난 바로 그 때문에 파티를 여는 거야.」 그녀는 삶을 향해 소리 내어 말했다. --- pp.159-160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좀 더 천천히 지나갔으면, 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싶었다. 어떤 즐거움도, 하고 그녀는 의자들을 바로 놓고 책 한 권을 서가에 꽂으며 생각했다. 어떤 즐거움도 젊은 날의 승리들과 결별하고 살아가는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가 가끔 기쁨에 떨면서 해가 뜨는 것을, 날이 저무는 것을 발견하는 것에는 비할 수 없었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알린다. 한 점, 두 점, 석 점.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다. 저기! 노부인이 불을 껐다. 온 집이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그러자 그 말이 떠올랐다. 태양의 열기를 더는 두려워 말라. 손님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얼마나 특별한 밤인가! 그녀는 왠지 그와 ― 자살을 한 청년과 ―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시계가 종을 쳤다. 납처럼 둔중한 원이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 p.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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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유월 중순의 어느 날 우아하고 활기 넘치는 귀부인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파티를 준비하던 중에 뜻밖에 첫사랑이던 피터 월시의 방문을 받고 한때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추억한다. 런던의 또 다른 장소에서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는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킨다. 셉티머스와 클라리사와 그 밖에 여러 인물들의 하루가 서로 얽혀 들어가고, 파티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삶은 한데 모아지게 되는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1923년 유월 어느 날 함께 만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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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고전이라 불리는 『댈러웨이 부인』은 〈소설사에서 몇 안 되는 진정한 혁신의 하나〉로 손꼽히는 난해한 〈의식의 흐름〉 또는 〈내적 독백〉 기법이 단순히 실험되었다는 의의를 넘어서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필치와 비범한 지성과 창조력이 결합된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이다. 특히 심리적 방법, 의식의 흐름을 표출하는 내적 독백 등 모더니즘 소설의 기법 면에서, 그리고 작품의 시공간적 구도 면에서 비슷한 까닭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비교되곤 한다.
더 나아가 〈방법은 성공적일수록 주목을 덜 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방법〉을 전면에 내세운 많은 실험적 작품들이 새로운 시도 이상의 의의를 획득하지 못하고 잊혀 가거나 그 난삽함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는 읽히지 않는 반면, 『댈러웨이 부인』은 그런 실험적 의의를 넘어서 널리 호소력을 가지며 문학 작품으로서도 성공을 거둔다. 물론 작가의 문장이 단순 명쾌하고 쉽게 읽혀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 레이스처럼 정교한 그 구문을 통해 작가가 그려 내는 것은 현학적이지도 난해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삶이다. 이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기도 한 것은 그처럼 폭넓은 호소력과 삶에 대한 섬세하면서도 깊은 이해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1923년 6월의 어느 하루 동안 여주인공인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위해 꽃을 사러 가는 데서 시작하여 저녁의 파티에서 끝을 맺는 이야기이다. 클라리사는 오십대 초반의 상류층 여성으로 아침 일찍 런던의 길거리로 나서면서 30여 년 전 자기 앞에 놓인 삶을 향해 무한한 설렘을 가지고 뛰어들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에 부풀어 있던, 세상을 개혁하려 했던, 모든 일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론을 가지고 있던, 그 발랄한 처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은? 바로 그날 30년 전의 첫사랑이 귀국하여 찾아오고 옛 친구가 우연히 파티에 들른다는 우연의 일치는 사실주의적인 견지에서는 개연성이 딸리는 얘기지만, 그런 설정 덕분에 등장인물들은 30년 전의 옛 시절과 현재의 삶 사이를 오가며 그 사이에 놓인 세월의 폭과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하지만 30년 전 찬란했던 청춘남녀의 모습은 어느덧 부르주아 산업가의 아내로, 사회적 낙오자로, 클라리사 자신은 〈계단 위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완벽한 안주인〉이 되어 있다. 결국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이렇다든가 저렇다든가 말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고 만 것이다. 처음 시작과는 사뭇 다르게 와버린 길,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의 이쪽 끝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녀는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았던가를 자문한다. 작가가 보여 주려는 것은 바로 이런 인생의 이면이었을 것이다.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 사람들 사이의 고독, 서로의 눈에 비치는 그 인간적인 왜소함과 나약함 등. 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도, 살고 있는 사회도 진정한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에서 〈나는 사회 체제를 비판하고, 그것이 가장 가열하게 작동하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고 쓴 바 있는데, 실제로 작가는 영국 사회를 지배하는 각종 권위에 도전하는 듯하다. 정체 모를 귀빈의 차량에 표하는 군중의 맹목적인 경외감이라든가 대영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상의 범용함, 여러 인물들의 허세와 속물주의 등이 그것이다. 클라리사의 파티 준비와 병행되는 또 하나의 줄거리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라는 인물의 광기와 자살에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 역시 전쟁의 광기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의사들의 횡포이다. 그렇다고 해서 『댈러웨이 부인』이 사회 고발 자체를, 인간에 대한 풍자를 목적으로 하는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억압에 굴하지 않는 삶에 대한 긍정을, 불완전한 인간들에 대한 포용을 모색하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