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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雜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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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삼백 년 전에 이씨의 한 집안이 무룡(舞龍)재를 넘어서 이곳으로 와서 살림을 시작한 것이 이 오학동의 시작이었다. 조상의 뼈를 좋은 곳에 묻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삼백 년 뒤 그때의 그 조상부터 십 오륙대가 내려온 지금에는 거기는 커다란 동리를 이루고 호구 일백 사십여 호 사람의 수효 육칠백 명 항렬로 캐어서 어린아이의 고조부로 비롯하여 늙은 고손까지 촌수로는 이십 육칠 촌까지의 순전한 이씨와 그의 안해들로써 커다란 말을 이루었다.
오학동의 동쪽에는 무룡(舞龍)재라는 매우 가파로운 묏견이 있었다. 서편으로는 말령[馬嶺]이라는 역시 가파로운 묏견이 있었다. 그 무룡재와 말령은 오학동에서 오 리쯤 남쪽에 가서 겨우 작은 개천이 하나 흐를 이만치 벌어지고 오 리쯤 북으로 가서는 서로 합하여서 만약 하늘에서 그곳을 내려다 볼 것 같으면 그것은 마치 묏마루에 있는 한 구렁텅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오학동과 그 근방 일대 - 무룡재와 말령에 둘러싸인 -를 가리켜 ○○골이라 하였다. 여자의 생식기를 따서 붙인 그 골짜기의 이름은 모양으로 보아서 그럴듯하였다. ○○골에는 마을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물론 오학동이요 또 하나는 정방(正坊)이라는 동리였었다. 오학동은 ○○골의 중앙에 있었고 정방은 무룡재와 말령이 북쪽에서 합한 그 산밑에 있었다. 두 마을의 거리는 한 오 리쯤 되었었다. 오학동에서는 많은 선비가 났다. 첫번 오학동을 개척한 선조가 세상을 버리고 이곳으로 있던 선비이니만치 그의 후손에도 많은 선비가 났다. 과거에 장원을 하여 그 이름이 근방 일대를 떨친 선비까지 있었다. 연년이 무룡재와 말령의 가파로운 길을 넘겨서 많은 며느리를 맞아오고 많은 딸을 내보내는 동안 일가가 늘어 가면 늘어 가느니만치 선비의 수효도 늘었다. 낮에는 밭갈고 밤에는 글읽고 이러는 동안에 연년이 늘어 가는 그 일가는 가까운 장래에 이 ○○골에 차고 넘을 듯이 보였다. 다른 동리에서는 오학동을 양반의 동리라 하였다. 오학동 사람들도 그렇게 자처하였다. --- “잡초(雜草)” 중에서 |